제 768 호 가을에 가을 옷 못 입는다...길어진 여름과 패션
가을에 가을 옷 못 입는다...길어진 여름과 패션▲ 상점의 가을 옷과 상반되는 여름 복장과 선풍기 (출처 : https://news.nate.com/view/20240825n05844)
9월이면 패션 브랜드는 가을·겨울 신상품을 내놓는다. 매장 전면에는 니트와 트렌치코트가 걸리고 온라인몰에는 'FW 신상' 배너가 붙는다. 물론 개강을 앞둔 학생들도 이 시기에 옷을 산다. 새 학기에 옷장을 바꾸는 건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에는 반팔이 남아 있다. 9월 중순까지 한낮 기온이 25도를 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여름이 그대로이다. 미리 사둔 재킷은 걸린 채로 10월과 11월을 기다리게 된다.
대학생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강의실 에어컨은 세게 돌고 밖은 덥다. 학생들은 안은 춥고 밖은 더운 하루를 하루에도 여러 번 오가게 된다. 즉, 얇은 니트, 가디건, 트렌치코트 등의 간절기 옷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계절 상품은 달력에 맞춰 나오는데 기온은 달력을 따라오지 않는다. 본 기사에서는 가을이 왔지만 가을옷을 입지 못하는 상황이 옷장과 업계 양쪽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짚어본다.
가을은 얼마나 늦게 오고 있을까?▲ 더위가 극심했던 2024년 9월의 최고 기온 통계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586915)
절기상 가을의 시작은 입추이다. 입추는 대개 8월 7일 무렵으로, 이름과 달리 한 해에서 가장 더운 시기와 겹친다. 그 이유는 절기와 기온 사이의 시차에 있다. 24절기는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고 기준 지역도 한반도가 아니다. 절기와 체감 사이에는 원래부터 간격이 있었다.
비록 입추가 지나면 기온은 조금씩 내려가지만 가을이라고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처서를 지나고 백로를 넘겨도 한낮은 여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절기가 체감과 어긋나는 것 자체는 새롭지 않다. 다만 예전에는 입추와 처서를 지나며 아침과 저녁으로 바람이 바뀌는 게 확인됐지만, 요즘은 9월 중순이 되어야 그 변화가 오는 해가 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기상청이 1973년부터 2025년까지 53년간의 관측자료를 분석한 결과, 최근 10년(2016~2025년) 평균 폭염일수는 18.3일이었다. 과거 10년(1973~1982년)의 8.3일보다 2.2배 많은 수치이다. 특히 열대야는 4.1일에서 12.2일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더위의 시작과 끝도 달라졌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폭염 시작일은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10~30일가량 빨라졌다. 과거 7월에 시작되던 더위가 이제 6월 상·중순부터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반면 종료일은 열흘쯤 늦어졌다. 서울의 최근 10년 평균 폭염 종료일은 8월 15일에서 8월 21일로, 대구는 9월 2일까지 밀렸다.
8월 더위는 예상된 더위지만 9월 더위는 달력과 어긋난다. 개강으로 일상이 바뀌는 시기여서, 학생들에게는 이 어긋남이 곧바로 옷차림 문제가 된다. 9월 초 캠퍼스에는 반팔과 긴팔이 섞여 다니고, 아침에 긴팔을 입고 나온 학생이 점심에는 팔을 걷는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는 북태평양고기압의 이른 확장과 늦은 쇠퇴, 한반도 주변 해수면 온도 상승을 지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름을 만드는 기압계가 더 빨리 오고 더 늦게 물러가면서 계절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경계가 흐려지면 옷을 고르는 기준도 흔들린다.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뉜 상품 주기와 실제 기온이 맞지 않으면, 소비자는 계절이 아니라 그날의 기온을 보고 옷을 사게 된다.
계절을 앞서가는 패션, 현실을 살아가는 소비자
패션업계의 시계는 늘 실제 계절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가을·겨울(FW) 신상품은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한여름부터 매장을 채우기 마련이다. 소비자가 계절 변화를 미리 준비하도록 돕겠다는 취지지만, 문제는 매장의 디스플레이와 밖의 날씨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9월이 넘어서도 연일 폭염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서, 매장에 걸린 두꺼운 니트나 가을 재킷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부담일 뿐이다.
결국 신상품 소식을 접하고도 정작 소비자가 집어 드는 옷은 당장 입을 수 있는 반팔이나 얇은 셔츠다. 패션 기획자가 설정한 시즌과 실제 소비자의 체감 온도가 어긋나면서, 가을옷을 사고 입는 시점 자체가 뒤로 밀리고 있다. 특정 시즌용 옷보다는 1년 내내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선호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한 소비자는 "날씨 변화가 예측하기 힘든 시기이다 보니, 특정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계절에 걸쳐 고루 입을 수 있는 옷을 주로 찾게 된다"라고 전했다.
예전처럼 얇은 겉옷이나 셔츠 하나로 가을 분위기를 내며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날이 드물어졌다. 무더운 여름 날씨가 길게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찬 바람이 불며 겨울로 직행하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마련한 간절기 옷을 몇 번 입지도 못하고 옷장에 넣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사라지는 간절기, '시즌리스'가 가져온 착장의 변화
이처럼 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지자 소비자들의 선택 방식도 달라졌다. 특정한 한 계절만을 위한 옷 대신, 여러 계절을 넘나들며 입을 수 있는 옷을 찾는 경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패션의 핵심은 '레이어드(겹쳐 입기)'다. 여름에 입던 얇은 셔츠 위에 가벼운 조끼나 겉옷을 걸치고, 기온이 더 떨어지면 그 위에 코트를 덧입는 방식이다. 하나의 옷을 특정 시즌에 가두지 않고 기온 변화에 맞춰 자유롭게 조합한다.▲ 시즌리스 룩 (사진: 듀베티카의 가을 바람막이 오스티아)
이는 패션계의 '시즌리스(Seasonless)'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이제 '봄옷', '가을옷'을 따로 사기보다, 소재와 두께를 조절하며 일 년 내내 돌려 입을 수 있는 기본 아이템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짧아진 간절기가 소비자의 단순한 옷차림을 넘어 패션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달력에서 기온으로, 패션의 기준이 바뀐다
기후 변화로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고 봄과 가을은 아득히 짧아졌다. 패션업계가 정해놓은 거창한 시즌 구분은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소비자의 삶 속에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을이 왔으니, 가을옷을 산다'라는 기존의 공식은 깨졌다.
앞으로의 패션은 달력의 숫자보다 당장의 '실제 기온'과 '옷의 활용도'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단 한 계절만을 겨냥한 옷보다는 계절과 계절을 부드럽게 잇는 옷, 그리고 이를 유연하게 연출하는 레이어드 감각이 현대인의 옷장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계절의 변화 속도에 맞춰, 우리가 옷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기준 역시 새로 쓰이고 있다.
박찬웅 기자, 서성민 기자